[20170804] 「할매-할배만 찾던 전통시장, 아이 울음소리 들리기 시작한 까닭은?」
작성일 2018-04-25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75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위치한 선산봉황시장. 조선시대부터 5일장이 시작됐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역사와 전통 외에는 자랑할 게 그리 많지 않은 곳이었다. 1993년 현대식 건물로 바뀐 후 106개 점포가 운영되고 있지만 2층 공간은 공실(空室)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장날(2, 7일)만 노인들이 주로 찾을 뿐 젊은이들은 외면했다.
이랬던 선산봉황시장에 최근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시장을 찾는 젊은 부부부터 교복을 입은 청소년까지 젊은층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한 달 전. 지난 6월 27일 이마트가 ‘노브랜드 청년 상생스토어’의 문을 열면서다. 대형마트-전통시장-청년상인의 상생 프로젝트다.
 
 
구미 선산봉황시장, 상생스토어 실험 한달
이마트와 손잡고 젊은 고객 모시기 나서
키즈카페, 문화교실 등 고객서비스로 눈길
상인들 적극적인 아이디어와 제안도 계속돼
지자체 및 전국 전통시장 250명 견학다녀가
이를 위해 이마트는 공실이던 선산봉황시장 A동 2층 1652㎡(약 500평) 공간을 노브랜드 매장과 청년몰로 꾸몄다. 420㎡(약 125평) 공간에는 노브랜드 매장이 들어섰고, 청년 상인 17명이 운영하는 청년몰은 840㎡(250평) 규모다. 상생의 취지를 살리고자 노브랜드 매장에 가기 위해서는 청년몰을 거쳐 가도록 동선을 짰고, 아이를 위한 '키즈 놀이터'도 만들었다. 여기에 시장 상인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시장은 활력으로 채워지는 중이다.
지난달 27일 찾아간 선산봉황시장 청년몰.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키즈 놀이터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이었다. 시설은 대형마트와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키즈카페와 동일한 수준이지만 이용료는 5000원으로 저렴하다. 전통시장에서 구매한 영수증을 제시하면 20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손녀 둘(다섯 살, 세 살)을 데리고 시장을 찾은 도순분(58·여)씨는 “요즘 같은 폭염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만한 공간이 없었는데, 키즈 놀이터가 생겨서 데리고 나왔다”면서 “어른들은 장도 볼 수 있고 아이들은 즐거워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도씨의 손녀들은 ‘이제 그만 가자’는 할머니의 말에도 “조금 더 놀고 싶다”며 곳곳을 누볐다. 휴가를 맞아 고향을 찾은 김현아(36·여)씨는 “친정에 올 때마다 네 살 딸아이와 갈 데가 없어 걱정했는데, 이젠 한시름 덜게 됐다”고 말했다.
키즈 놀이터만 북적이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 아이를 맡기고 바로 앞에 있는 노브랜드 매장을 찾고, 쳥년몰 가게에서 물품을 구매하면서 시장 전체가 활성화되는 선순환 구조가 생겼다. 청년몰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노주연(42·여)씨는 “며칠 전에는 국수를 먹기 위해 손님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면서 “식당 공간이 협소해 더 많은 손님을 맞이하지 못해 아쉬울 정도”라고 말했다.
박성배 선산봉황시장 상인회장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주로 찾던 시장에 이제는 절반 가까이는 젊은 고객이 찾는 곳으로 바뀌었다”면서 “이런 모습은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최근에는 방치돼 있던 1층 점포 네 곳도 새로 들어와서 영업을 시작하거나 준비 중에 있다”고 전했다. 시장과 이마트에 따르면 장날 기준 평균 600명의 고객이 상생스토어를 찾고 있다.
선산봉황시장의 성공적인 변화는 이마트의 지원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시장 상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선산봉황시장에서 2015년부터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연(39·여)씨가 먼저 이마트 측에 상생스토어 입점을 제안했고 시장 상인도 설득했다. 김씨는 시장 1층에 자리한 ‘오! 은하수공방’에서 천연비누 등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처음에 반대했던 상인들도 시장이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설득을 받아들였고, 지난 2월 시장 상인회가 이마트에 상생스토어 개설을 공식 제안했다. 이마트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판매 품목을 시장 상인회와 협의해 조정했다. 신선식품 중에서는 내륙 지역인 구미에서 생산되지 않는 생선·조개 등 수산물만 판매한다. 수산물 외엔 주로 가공식품과 생활용품 등 공산품 위주로 판다.
상생스토어를 처음 제안한 김수연씨는 “처음에는 ‘시장이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이마트에 요청했던 것인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잘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면서 “아이 엄마들이 소식을 듣고는 저한테 와서 ‘시장을 바꿔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변화를 위한 상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현재진행형이다. 키즈놀이터와 노브랜드 매장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청년몰 한쪽에 마련된 아카데미 공간에서 열리는 문화교실. 전통시장에서 대형마트 문화센터와 비슷한 문화교실이 1주일에 서너 차례 열린다. 도자기 공예부터 캘리그래피, 어린이 재테크나 요리교실 등으로 다양하다. 이날도 사진강좌가 진행 중이었다.
문화교실은 외부 강사가 오기도 하지만 재능 기부 형식으로 주로 이뤄진다. 시장상인들이 특기를 살려 강사로 나서는 것이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청년상인이 사진강좌를 하는 식이다. 그 때문에 별도의 수업료를 받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재료비(1000~2000원)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선산봉황시장 청년몰 조성사업단 정효경 단장은 “아이를 위한 문화공간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문화 인프라까지 갖추면 자연스레 젊은 사람들이 전통시장으로 찾게 만들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면서 “상인들이 강사로 나서면서 재능 기부도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매출 증대와 마케팅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선산봉황시장의 변화가 알려지면서 전국 전통시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 구미시 이운균 지역경제계장은 “다른 지자체가 선산봉황시장의 변화를 우수 모델로 보고 견학을 많이 오고 있다”면서 “시에서도 앞으로 더 많은 지원에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구미시에 따르면 한 달간 부산시 소상공인진흥공단을 비롯해 대구·울산·창원·통영의 15개 소상공인 단체 및 지차단체 관계자 250여 명이 선산봉황시장을 다녀갔다.
구미=중앙일보 장주영 기자 jang.jooyoun@joongang.co.kr